납기 - 개발자의 영원한 굴레



낼모레가 납기라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고, 등줄기가 뻐근해 지는게, 방금 마신 커피가 체기를 일으킨다.


그렇다. 개발자에게 지상최대의 개목걸이는 바로 납기다. 그렇다고 무슨 자격증처럼 한번 따면 그것으로 효력이 유지되는 시스템이 아니라, 물리치면 바로 되살아난다. 바로 앞전의 납기를 맞춘건 이번 납기하고는 아무런 친척관계도 아닌게 된다.


밤을 낮삼아서 손가락들이 알아서 코딩을 하지만 문제는 디버깅이다. 그 때나 잠깐 머리를 쓰게 되지만 사실 이 버그들의 대부분도 거의 손가락들이 알아서 잡아주더라. 여하튼, 어렵게 어렵게 하나의 납기를 맞추고 나면 바로 다음 납기가 기다리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더라. 먹구 살려니 납기랑 씨름을 하게 된다. 거참 그놈의 납기는 정말 빨리 빨리 돌아오더라. 내가 빚쟁이냐? 이 무슨 프로레스링도 아니고, 납기들은 질서도 정연하게 차례차례 줄서서 터치해가며 나를 메다 꽂는다.


내 인생이 결국은 납기와의 전쟁이 아니가 생각해보지만, 이거는 계란으로 바위치는 꼴이다. 내 계란 머리는 납기에 부딪혀서 깨지기 일쑤다.


가끔씩 그 중압감에서 벗어나보려고 프로젝트 초기에 디립다 밤샌다. 그럼 나중에 좀 덜 힘들지 않을까하고 속도를 낸답시고 초반부터 러쉬다. 이무슨 개 삽질이냐!


프로젝트 말기에 가면 어김없다. 날밤을 샌다. 아니 우리끼리 쓰는 말로 날밤깐다. 흠! 그러고 보니 이 말이 참 재미있는 말이군. 날밤을 깐다니......


어느 책에서 일감바구니란 말이 나온다. 누구나 일감바구니가 하나씩 있고, 누구나 그 일감들에 쫒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들은 일감이 아닌 것이지만, 희안하게도 그 일감에 노예가 되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일감 바구니는 당신이 죽을때까지 아무리 비우고 싶어도 절대로 비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니, 빨리 끝내면 빨리 끝내는 대로, 늦게 끝내면 늦게 끝내는 대로 일은 계속되었던 것같다. 그래, 나도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 대해서 좀더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하지만, 막상 납기가 다가오면 밤새미랑 친구할 수밖에 없다.


사실 프로그래머란 직업을 이해못하는 사람들은 저 인간들은 왜 저러구 사나 참 희안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맞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만 하고, 주말에도 나오고, 가끔 시스템 작업한다구 추석이든 설날이든 밤새고......


그렇지만, 프로그램 짜는게 재미있는걸. 뭐. 디버깅하는 희열이나 내가 짠 프로그램이 버그 없이 씽씽 돌아가면서 원하던 것 그 이상의 성능을 나타낼때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성취감을 음미하는 그 맛에 이 쌩 노가다를 하는거 아닌가?


납기. 생각해보면, 그건 나하고의 약속이자, 월급받는 대가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을 연습삼아 이렇게 저렇게 짜보면서 실력을 늘리수는 있지만 어차피 회사는 돈을 벌어야 내 월급도 나오는거 아닌가?


밤새는게 열받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고 그 길에 납기란 넘이 있지만, 또 그 넘이 없다면 아슬아슬 맞추는 납기의 스릴과 납기 후의 시원한 생맥주 한잔에 집에 들어가서 축늘어져 버리는 시체놀이의 즐거움이 없지 않겠나?


납기여 기다려라. 요번에는 기필코 네 코를 납작하게 해주마.


< 아래는 2014년 8월 23일에 추가함>


이제 왜 우리나라 개발 프로젝트들은 납기를 지키기가 힘든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40대 중반이 되서야 알게 되다니...


우리와 실리콘 밸리의 기술력의 차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프로젝트들은 높은 기술력을 원하는게 아니다.


일반적인 한국의 SI성 프로젝트는 요구사항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알아서 잘 만들어 달라는게 요구사항의 전부다. 그리고서는 프로젝트에 참여도 하지 안는다. 그러니 분석이 제대로 될리가 없고 만들어도 막판 인수 테스트에서 퇴짜놓기 일쑤다.


실리콘밸리의 문화는 발주하는 사람이 요구사항을 명확히 기술한다. 그걸 가지고 개발사는 요구사항명세서(SRS, Software Requirements Specification)를 만들어내고, 개발, 테스팅, 문서, 매뉴얼이 이 문서를 가지고 동시에 병행 진행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된 SRS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과녁이 없는 목표에 활을 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이런 상태로 SI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는 건 신기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나라 SI 프로젝트의 성공률은 거의 100%에 달한다. 세계적으로 성공하는 프로젝트(연기나 추가비용 투입없이 목표대로 끝난 경우)는 30% 내외다.


우리는 갑과 을이 서로 볼모를 잡는다.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갑의 담당자도 문책을 받고, 을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니, 이런 프로젝트의 종말은 갑과 을의 고위층간의 룸살롱 미팅으로 결판난다. 그러다보니 기술력이 중요한게 아니라 영업력이 중요하게 되는 이상한 구조의 산업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개발자를 머리수로 계산하는 막노동으로 변질된 것이다.


우리는 개발문화가 제자리 걸음인데, 실리콘밸리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후배들의 미래가 걱정될 뿐이다.


그나마 몇년전에 정부가 나서서 개발자를 건설업과 같은 형태로 소프트웨어 산업을 분류하여 관리한 것은 잘못이었다면서 반성하고 변하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집약산업이 아니라 지식집약산업으로 대우해주겠다는 것인대, 아직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제 뛰어난 젊은 인재들이 의사가 되겠다고, 개발자는 할게 못된다고 사회가 변해버린 결과만 남았다.


- 출처 : 자작

- 최초 작성일 : 2003년 11월 22일

- 최종 수정일 : 2014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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