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의 비전



내 일찍이 조숙해서, 신입사원으로 S모 그룹에 입사한 이래로 선배들을 쫓아다니면서 비전이 뭔지를 물어보아 왔다. 근 10년의 세월 속에 위대한 선배들의 답중에 1위는 허무하게도


"치킨집"


이었다. 아니, 최고의 컨설턴트도 아니고, 대기업 CTO도 아닌 치킨집이라니......


허나, 옆에서 보기에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일지라도 비전이라는 물음 앞에 담담히 치킨집이라고 답함으로써 갓 입사한 신입사원의 패기와 꿈과 이상을 단번에 날려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은 신입사원이었던 시절이기에 순진하게도 나는 선배들처럼 그냥 치킨집이나 한다는 그런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겠다고 속으로 얼마나 다짐을 했던가?


세월은 흘러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수많은 선배들,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등등 만나는 선배님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은 한결같이 치킨집이었으니, 이게 개발자의 비전에 대한 정답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치킨집"인가에 대해서 좀더 명쾌한 분석을 내려보자.


먼저, 치킨집은 주변에 자주 볼수 있고, 장사도 좀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만일 차린다면 안정적일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두번째는 치킨집을 낼때 드는 초기 투자 비용으로 보면, 적게는 몇천에서 많게는 몇억까지 다양하지만, 그래도 회사원이 오랜 직장생활을 통해서 그나마 모을수 있는 돈의 범위에 들어있다는 점이다.


세번째는 치킨집은 쉬워보인다는 단순한 생각이 그 배경인 셈이다.


왜 우리의 쟁쟁한 무림 고수들이 가진 실력을 모두 쏟아부어서 천하를 통일하지 않고 재야에 묻혀서 닭이나 팔면서 살고 싶어 할까?


사실 일부 잘나가는 고수들이 있어서 천하통일에 매진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전체 개발자 머리수로 보면 통계상 새발의 피도 안되는 숫자의 고수들 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것 처럼 보인다. 문제는 실제 유명인 몇몇은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실제로 주변에 그런 인물은 없다.


더 큰 문제는 순수 개발자가 회사를 하면 거의 말아먹더라는 거다. 즉, 개발자는 CEO는 못한다는 것이며, 영웅이 아니라 옆에서 받드는 모사가나 가신 정도의 수준으로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샛길로 빠졌다. 다시 비전으로 돌아가서,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본인도 뒤를 돌아보니, 그동안 남의 비전이 뭔지 물어보다가 세월다 갔다. 이제는 나도 그럴싸한 비전하나 설정해서 뭔가를 이뤄보고 싶은 나이도 됐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위에 있는 부장이나, 실장, 이사들이 사실은 내 미래의 모습인데, 그렇게 썩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내 밑에서는 나를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생활할테지만, 이렇게 사는게 그들에게도 좋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래도 줘 들은 풍월에 10년의 경력이 쌓여서 나름대로 잘난 개발자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비전이 없다는 말을 하면, 이제 막 나한테 배우고, 나를 따라 잡으려 열심인 후배들은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왈,


"선배님이 그러면, 미천한 나는 어쩌나?".


그러나, 예전과 비춰서 남들에게 10년동안 비전이 뭐냐구 물어보고 다니면서 한가지 얻은게 있다. 이제는 비전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비전이란 선배나 회사가 주는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누구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이다. 내가 나한테 줄수 있는 비전이 뭘까?


니는 비전이 뭐꼬?


< 아래는 2014년 8월 23일 추가함 >


2003년 원본에서 "치킨집"이 아닌 "빵집"이었다. 빵집, 커피숍, 치킨집 이런 것들이 경쟁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치킨집이 천하통일 했다. 그래서, 현재 모든 개발자들은 치킨집의 의미를 깨닫고 있다.


이글을 쓴 뒤로 또 10년이 지났다. 어느덧 나는 개발자의 무덤에 해당하는 40대 중반이 되었다.


묻고 싶은게 많을 것이다. 


아직도 개발하냐? 아니 --; 

음. 관리자와 아키텍트의 어중간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그렇다. 아직도 회사란 곳을 다니고 있다. IT 업종의 회사.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다른 직원들은 내가 개발자였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초기에 가끔 나에게 개발 기초 지식같은 걸 설명하려 드는 초급 개발자들이 있었다. 재미있었다.


비전을 찾았냐고? 아니 --; 

자영업자들이 하도 많이 넘어지는 것을 본 뒤로는 그나마 치킨집도 겁나서 ......

개발자로서 최고의 시절인 30대를 멋지게 보내고, 비전을 찾아 직장을 몇 번 옮겨봤다. 옮겨본들 회사는 어디나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40대 개발자에 대해서 글을 한번 써야겠다.

내 주변 IT에 종사하는 40대 인물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사회에 적응해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글이 너무 길어지니 집중력이 떨어지네... 수정은 여기까지!


- 출처 : 자작

- 최초 작성일 : 2003년 11월 3일

- 최종 수정일 : 2014년 8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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